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화빈 윤씨 (문단 편집) === [[상상임신]] === >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을 사적(仕籍)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였다. 신응현이 상소하기를, "건국 이래로 어찌 '''20여 달이나 산실청(産室廳)을 둔 때가 있었습니까?''' 기만하는 습관에 대해 신은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의관(醫官) 오도형(吳道炯), 정문수(丁文壽) 무리들이 감히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임금의 앞에서 장담을 하여 '''열 달의 뒤로 3년이란 오랜 세월을 끌어왔습니다.'''" > - 《정조실록》정조 7년 3월 3일 갑오 3번째기사 > 이어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에게 물으니, 김치인이 말하기를, "이 일은 '''산실청(産室廳)에서부터 30삭(朔)에 이르렀을 때까지''' 여항(閭巷)의 말이 이미 의혹스러운 것이 많았는데, 임인년 가을의 대경(大慶)에 대해서는 참으로 타고난 천성(天性)을 지키려는 자라면 그 누군들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만 어떤 종류의 의론은 공공연히 말하기를 꺼려서 ‘나라의 경사[邦慶]’라는 두 글자를 모든 장주(章奏)와 말하는 사이에 금법이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하였기 때문에, 대소(大小)가 함께 분개하고 나라 안의 말이 들끓어 모두 한 곳에 의심을 두었으나 다만 감히 말을 하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 - 《정조실록》정조 11년 1월 19일 무자 5번째기사 >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 - 황윤석, 《이재난고》 [[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aa10no=kh2_je_a_vsu_55001_035&aa15no=035&aa20no=55001_035_0059|#]] > "선왕께서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는 문효세자(文孝世子)를 낳고 한 따님은 1년이 못 되어서 죽었다. 지금의 상전하(上殿下)와 숙선옹주(叔善翁主)는 모두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낳았다." > - 《순조실록》 순조 16년 1월 21일 신축 2번째 기사 다른 후궁들은 출산 기록이 있는 《[[조선왕조실록]]》, 《선원계보기략》 등 어디에도 화빈의 출산과 자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동안 임신 기록만 있고 출산 기록이 없어 의문점으로 남았는데, 정조 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서 '''대놓고''' 화빈 윤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고 명시되어있다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산실청이 30개월 넘게 설치되었다는 《이재난고》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의 기록과 일치한다.[* 실록에도 화빈 윤씨가 30개월이 다 되가도록 아이를 못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기록되어있지만 《이재난고》와 달리 화빈 윤씨라고 콕 찝어서 말하지 않아 실록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또한 정조가 문효세자 출생 당시,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문효세자가 정조의 첫 아이임을 알 수 있다. [[1781년]](정조 5년) [[1월 17일]] 화빈 윤씨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으나[[http://sillok.history.go.kr/id/kva_10501017_003|#]], 그로부터 10개월 후인 [[1781년]](정조 5년) [[11월 2일]] 화빈 윤씨의 출산을 기다리는 기록만 있을 뿐[[http://db.itkc.or.kr/dir/item?itemId=IT#/dir/node?dataId=ITKC_IT_V0_A05_11A_02A_00050&solrQ=query%E2%80%A0%ED%99%94%EB%B9%88%20%EC%9C%A4%EC%94%A8$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IT_AA$solr_toalCount%E2%80%A07$solr_curPos%E2%80%A03$solr_solrId%E2%80%A0BD_ITKC_IT_V0_A05_11A_02A_00050|#]], 출산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열 달 동안은 배가 불러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진맥을 잘못했거나 유산한 것은 아니고, '''상상 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화빈처럼 효의왕후도 상상 임신이었는데 화빈과 다른 점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 임신이었어도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그에 반해 화빈의 경우는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으며, 여항 말이 이미 의혹스러운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재난고]]에 따르면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은 후에도 화빈 윤씨의 산실청이 지속되어 문효세자의 원자 정호(출생 2개월 뒤인 1782년 11월 27일 원자 정호가 실시됨.)가 늦어졌으나[* 또한, 정조가 만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왕자(문효세자)가 탄생한 경사를 보았기 때문에 석복(惜福) -복을 아껴서 복을 오래 누리려는- 마음을 매양 간직하고 있었다고 정조는 말했다. 《[[일성록]]》 1782년(정조 6년) 11월 27일 기사.] 그러나 [[1784년]](정조 8년) 문효세자는 3세(22개월 만1세)의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는 정조의 차남인 [[순조]]가 11세에 왕세자로 책봉된 것과 비교해 매우 빠른 일이었다. 화빈의 산실청이 30개월 이상 지속된 것[[http://sillok.history.go.kr/id/kva_11101019_005|#]]과 관련되어 [[1787년]](정조 11년) 1월 12일 조시위(화빈의 인척)는 귀양을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